조하..마하.. 존...
네이버블로그 마하조인도리
2012/12/04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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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럴 수도 있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어서 우선 적어보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마하"라는게 내가 나를 보는 그 관찰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건 단순화한 말이구요 내가 날보는 그걸 쉽게 반성이라고 하면 내 과거의 행동이나 생각과 감정들을 되돌아보며 비판하는 것이 되겠죠
또 현재의 내의식이나 감정이나 행동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거나 지켜보는 것도 있는데 이건 쉽게 대개의 사람들은 무의식으로 자기의 의식과 행동과 주변일들을 보는 것과 비슷하겠죠 의식은 모르고 지나친 것도 무의식은 더 자세히 알고 있기도 하다고 최면같은 심리요법으로 증명하기도 합니다.
자천에선 이것을 어느정도 의식화해서 의식이 의식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죠 이러면 도리의 의미를 조금 알게 되어가는 것이기도 하구요 사고하는 그 사고체계의 사고체계요
자기관찰이라고 하면 이정도의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알겁니다.
마음 알아채는 것이나 내가 나를 본다는 식의 그러한 것을, 의식적으로 나를 보는 것으로 아는 것요
이게 자천하면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고 그래도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질적으로 얼마나 비판적이거나 세세한 또는 정밀하고 현명하게 보느냐는 다르겠지만요
그리고" 마하"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것도 포함한다고 그동안 말해 왔는데,
대개는 자기관찰이나 성찰이라고 했고 "마하"라는 말을 그리 자주 쓰지는 않았어요 "마하"라는 것까지 다가가는 분들이 그리 많은건 아니라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생소한 개념을 쓰는건 아닙니다. 하던말을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니까요
감정이 일어난 후와 일어나 가는 것이나 일어날 때와 일어나기 전이나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나 이런식으로 세분할 수도 있을 겁니다. 더 세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인데 그건 요령이니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입니다. 요점은 세분이 아니니까요 암튼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도 지각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의식에 들어와 내가 안다는 것을 말하죠
이것도 두단계의 과정을 거쳐 인지를 한다는 것입니다. 감각하는 것과 감각하는 것을 의식한 것이겠죠
우리가 사물을 보면서도 뭘 보았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것엔 아예 무시해서 의식하지 못하거나 뭔가는 의식했지만 뭘 의식한다는 것을 몰라서 인지되지 않았을 때가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론 정확한 단어들이 있을거 같은데 내가 그러한 것을 잘몰라서 그냥 우리가 사물이나 감정이나 내가 뭔가를 지각하는데에는 크게 두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합니다.
밥을 보는 것과 밥이라고 인식하는 것이죠
처음은 그저 감각되는 것이고 두번째엔 감각된 것을 그게 무엇이라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감각이 오감으로 합니다. 눈, 코, 입, 귀, 피부로 하죠
그런데 자기관찰을 하거나 자천이 성장하면 여섯번째의 감각이 있는데 마음자체가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자아자체일 수도 있는 것인데 이거에 대한 말은 없는지 내가 잘 모르겠습니다.
육감(여섯번째라서 六感 이겠죠)이라고 하는게 있긴한데 비슷하지만 다른데 아마 이것의 변종이거나 끄트머리같은 일부일 수 있습니다.
암튼 이 마음자체의 감각이 있다는데 이걸 "마하"라고 하는거죠
내가 날 보는데 이게 왜 마음감각일까요?
이건 내가 머리로는 의식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데 그래도 내부의 어디선가 뭔가를 감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어렵풋이 아는거죠
분명 마음감각과 "마하"는 다릅니다. 마음이 뭔가 느끼는 것이고 그걸 관찰하는 것을 "마하"라고 하는 것인데 이게 그렇게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마하"라고 뭉뚱그려서 말합니다.
마음감각을 "구리"라고 하죠 서로 구분은 됩니다. 다만 내가 일일이 그러한 것을 나누면서 평소에 인식하지는 않고 "마하"라고 대충하는거죠
그럼 "마하"가 뭘 감각할까요?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는 또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감정과 사건이나 사물같은 것을 느낍니다. 감정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 있어야 일어나는 거죠 대상 없이는 감정은 일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감정이란 현실의 그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게 되는데 때론 대상이 없는데도 감정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건 미래의 일이거나 먼곳의 일이거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서이고 대상이 없어서가 아닌 내 능력의 모자람이라고 모른다고 봅니다.
그리고 감정이나 사건 사물이 다가오는 과정 그것도 지켜봅니다.
즉 어떤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이 다가오는 과정이 있으며 그리고 현재 감정이 일어나는 상황에 있으며 다시 미래에 다른 과정과 다른 감정으로 변형 될 것을 지켜봅니다.
그러니 과거현재미래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시간의 흐름도 봐야 하기 때문에 그냥 통채로 감각됩니다.
게다가 공간도 멀고 가까움과 상관없이 감각합니다. 존이죠
그러면 이게 뭔지 머리는 감잡기가 심히 곤란합니다.
영상도 아니고 언어도 아니며 이미지도 아니고 머리의 성격에는 안맞는 혼란한 감각이 됩니다.
그나마 직관으로 뭔가 하려고 하는데 그게 육감이겠죠
이런 작용이 있는데 다만 이렇게 뚜렸이 느끼는 것부터 해서 사실 진짜 마하는 이걸 어렴풋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어서 순간적인 감지가 있고 사라지며 아득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정확하다는 것은 머리의 인식이고 의식적인 것인데 마하는 의식이 아니니까요
이런게 있는데 대개는 마하를 자기관찰로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마하인데 자기관찰로 아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마하로 보는 것과 자기관찰로 볼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것은 굳이 구분안해도 상관없습니다.
굳이 나누어서 말하라면 이렇다는거죠
마하는 시간을 넘어서 보고 공간적으로도 초월해서 보는 것이라 좀 다른식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내 운명이나 외부섭리의 흐름도 감각하기 때문에 단순히 제삼자같은 자기보기가 아니라 변화자체를 느껴가는 것이겠죠
어떤면에선 배경자체나 명자체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설명은 감정의 변화를 시공을 초월해서 아는 것이라고 했지만 마음이 느끼고 마음이 움직이는 즉 구리나 마의 작용을 아는 것입니다. 심연의 깊은 작용들을 아는 것이죠
쉽게 경험하는 것은 타계의 변화나 타존재의 영향입니다.
주위의 이상한 흐름이나 의식들의 침입이 있는데 천원계는 이성적으로 언어를 이용해 사고하면서 있는 곳이 아니라 좀더 직관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걸 감지하는 것은 이러한 마하가 더 쉽죠
그래서 이 현실에서의 감각에 익숙하고 그것만 하려고 한다면 타계의 이해는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감각부터 다르고 감각이 다르니 사는 방식이나 흐름 자체의 상이함으로 인해 헷갈리는게 한 두가지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현실에서도 이러한 의식적인 사고와 마음적인 감응에대한 구분이나 서로간의 차이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즉, 심층의 일을 감각하는 것이 마하라는 것이 됩니다.
그럴려면 심층이 있어야 하겠죠
지계를 보고 사고하며 살아가는건 의식이나 무의식이 하고 정계이상은 마하가 한다고 보면 대충 이해하게 될까요?
원래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감정이라고 말하거나 일어난다 안 일어난다 말할 수 없는 것인데, 그래서 예를들어 화가 나야 화나기 전이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죠
그래서 화나기 전을 느낀다고 하면 이미 화가 난 것이지 화나기 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은 감정이 일어난 것은 맞다고 봅니다. 다만 화를 낼 대상이 아직 없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잘 관찰하면 여기서 이 감정의 전후사정이나 의미를 아련히 알거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사실은 감정만이 이런게 아니라 육체의 반응과 심리적인 다양한 분위기나 상태가 있고 말하기 어려운 다양한 감각들이 있습니다. 육체의 감각도 마음감각인 이유는 이미 육체와 마음이 몸의 재구성으로 서로 긴밀함이 다른것이겠죠
그래도 설명의 편의나 이해를 위해 감정을 주로 말하고 좀 과장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화의 감정이 있고 근데 내가 화낼 대상은 아직 내 앞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화내게 되는 대상과 만나고 다가가며 화를 내는 상황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기력함도 느낍니다. 내가 꼭두각시이고 다른 것이 나를 살고 있는 듯한 그런 아련한 고독을 압니다.
그렇다고 감정이 감정이 가짜도 아니고 참을 수 없고 처절한 마음의 아픔인데도 또다른 한편으론 그렇게 되어가는 순리를 압니다. 꼭 아픔만이 아닌 좋은 감정도 역시 그렇지만요
이때 화의 감정을 미리 안다고 해서 그게 지속적으로 있다기보다 감각하고 사라지거나 다른 감정에 의해 밀려났다가 일상의 진행속에서 화를 내야 하는 상황으로 되어가는 것을 역시 마하가 어렵풋하게 압니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아차싶고 그동안의 과정이 머리속을 지나가며 흐름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자주 경험하면 단순히 감정만이 아니라 다양한 운명이나 흐름들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화를 낼 것을 알았으면 화를 안내도록 해야 하지 않나 하거나 의미를 사후에 꿰어맞춘 것이지 일종의 착각일 수도 있다거나 무식해서 하는 소리라거나 여러 비판이 가능한데 이런 말들은 그저 예를 위해 한 말이고 "구리"라는 마음감각이 있으며 "마하"라는 것도 있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믿고 말고는 자유죠
기도 처음엔 의념으로 시작해서 느끼는 것을 하게 되지만 나중엔 기가 아닌 올을 알게 되면 이것도 단순한 피부감각이나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마음으로 감각하게 되고 마음의 흐름이 되어갑니다.
경험하고 체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두번의 경험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한 기술도 아니고 감각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이로인한 삶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하는 자기관찰은 "조하"라고 하면 되겠죠
가슴에서 하는 것이니 "마하"자나요
감정의 변화를 감지해야 하는데 감정엔 아까 말한대로 대상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대상이 없는 경우는 지금 현재 내 감정에 해당하는 사물이나 사람같은 직접적인 외부대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기억에 의한 것이거나 문득 일어나는 감정은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좀 다르죠
그래서 어떤 감정이 일어날때 이것이 지금의 일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이 감정대상이 지금 있는 것인지 아닌지부터 살펴야 하겠죠
이러건 조하로부터 시작해서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지만 너무 의식적으로 따지는 듯도 합니다.
마하로 하는 경우는 그렇게 따지거나 살피면서 이게 뭔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이 일어난다는데 그것이 아주 미약하게 흘러가고 딴데 정신팔이거나 바쁠 땐 모를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고 순간적이니까요 당연히 일반인은 아무리 느끼려고 해도 불가능하구요 자천력이 있다면 항상 마음의 고요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일상에서도 느끼는 것이죠
의식이 알든 모르든 뭔가를 보고 있고 느끼고 있으며 무언가가 일어날 거라는 것을 또는 이떻게 되고 이떻게 진행해 왔고 앞으로 어떻게 되어갈지 지금의 일인지 앞으로의 일인지 어림짐작처럼 뭔가의 감이 내면 깊숙히 있습니다.
대개는 그것이 눈앞에 일어나 현재상황으로 닥쳤다고 해서 내가 느끼고 있던 그대로가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마하로 느끼던 것은 언어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라서 그 형태가 애매모호하는 것입니다.
점점 드러나는 형상이나 사물이나 대상이나 그럴수는 있지만 이거역시 형태나 언어로 느끼거나 구체적인 상황으로 마하는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너머에서 형태 너머에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막상 상황에 닥치면 아 이런정도였나 이렇게 되는 거였나 하는 당황이 있기도 합니다.
뭔가 있을거 같고 뭔가 일어날거 같고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거나 내 뜻과는 다를 수 있는 거라는 정도였다고 생각되는데 막상 현실은 그보다 더욱 심하거나 더 교묘한 흐름이 있거나 정교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은 형상이나 언어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이러한 마하는 아닐 겁니다.
마하는 그러한 형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 것이고 마하가 조하로 넘어가서 해석한 것이겠죠
우리가 이 현상계에 살기 때문에 의식적이고 조하를 이용한 방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바로 마하를 쓰거나 다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항상 사물과 사람에 휩싸여 있고 언제나 외부에 의한 자극에 노출되어 있어서 그러한 것을 처리하고 감당하는 것이 일차적인 자기생존이고 삶이다보니 머리를 이용한 의식과 도리와 조하의 다룸이 익숙합니다.
마로 넘어가서 행동하거나 감각하는 것은 조하를 거쳐서 가지 바로 마하로 넘어가지는 못하기도 합니다.
자천하다가 가장 답답한 것이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말이 이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이치가 못알아들을 것도 아닌데 성취가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생소한 이론이나 복잡하고 어려운듯해 잘 모르겠지만 그건 자꾸 듣고 공부하면서 알려고 노력하면 어떻게든 됩니다.
그러다가 진짜 못알아듣는 것은 머리가 나쁘거나 둔해서가 아니라 다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건 심층적인 것인데 언어에 의해 또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이나 상황을 이용해 이해하는 버릇이 있는 경우 입니다.
딱 집어서 이거냐 또는 저거냐 하는 그런식의 사고 입니다.
서구적이고 원자화하고 환원해서 즉물적으로 설명해야 알아 듣는 것입니다.
이런경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고체계를 바꾸어 가야 하는 거겠죠 직접적인 것이 아닌 간접적으로 사물을 지시하고 개념을 잡는 요령을 배우고 돌려 말하고 돌려 듣는 그런식의 은유나 함축적인 이해를 하는 방법을 먼저 터득해야 겠죠
개그 프로를 보거나 시를 읽거나 남의 의중파악이나 보여지는 거 이면을 고민하면서 알아가는 재미를 느껴야 하겠죠
그다음 답답한게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게 명확히 다가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자천하고 견해가 생기고 뭔가 느끼는 것이나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역시나 모호하고 잘 모르겠고 그럽니다.
이거 역시 앞에서 말한대로 즉물적인 사고만을 해오던 사회생활이나 교육에 의한 버릇이 남아 있어서이고 그래서 자천에 대한 철저함이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조선을 넘으면 그러한 언어화되고 현상화되는 간단한 이치나 현상은 없습니다. 이걸 잘 모르는 것이겠죠 딱 해소되고 알아지는 것이 있다면 그게 오히려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한 것이겠죠 왜 알아지는지 그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알아지지 않는다고 답답할게 아니라 왜 알아지는 것이 아닌지 왜 원하는 만큼 알 수 없는지 그 원인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 원하는 것이 알아지지 않는다고 답답해 할게 아닌거죠 그러니까 알아야 할 대상을 잘못아는 것이 됩니다.
이런건 마하입니다.
마하이기 때문에 알아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하는 알아지는게 아니니까요 함께 흘러가는 내 일부입니다.
마하가 감각하고 보기위한 것이 아니라 마하를 그러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각해야 하니 뭔가로 감각을 한 것이고 그것을 마하라고 한 것입니다.
감각할 필요가 없다면 마하는 없어지니다. 마하만이 아니라 몸의 어떤 것이든 필요하니 거기 그런일을 하면서 있는 것이지 진짜 나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난 감각할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감각하는 것이니 그 본말전도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뭔가 알려고 뭔가 느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난 나로서 더이상 부족함이 없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의식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이 마하의 흐름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조하나 의식을 내리고 마하로 넘어가기 위해 하는 인위적인 방법입니다.
마하가 감지하고 있는 그것을 알기위한 것이죠 정확하게는 구리가 감각하는 그것을 마하로 알려는 것이겠죠